중국 베이징 중심부로 자금성과 왕푸징 사이를 오가는 차량 대부분은 소리 없이 주행한다. 초록색 번호판을 단 BYD 택시가 앞서고 그 뒤를 니오(NIO)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부드럽게 추월한다. 이 도시에서 전기자동차는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다. 베이징 시내에서 만난 리샤오원 씨는 "요즘은 오히려 가솔린 차량이 더 낯설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베이징은 굉음이 사라진 '조용한 도시'로 변하고 있었다. 한국이 머잖아 도래할 전기차 시대를 준비 중이라면 중국은 이미 그 미래를 살고 있었다.
베이징 도심에서 마주친 BYD, 니오, 샤오미, 지커, 립모터 등 전기차 대부분은 중국산, 특히 CATL과 BYD의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탑재했다. 한국 배터리3사의 제품이 들어간 차량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국내 배터리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는 중국 내수시장 경쟁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대신 북미와 유럽 중심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제너럴모터스(GM)와의 합작사 얼티엄셀즈를 포함해 미국 내에서 6곳 이상의 배터리 공장을 운영하거나 건설하고 있다. SK온은 포드와의 합작사 블루오벌SK를 기반으로 고에너지 밀도 중심의 삼원계 배터리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왔고 삼성SDI는 BMW, 아우디, 포르쉐 등 고급 브랜드에 하이니켈 니켈코발트알루미늄(NCA) 배터리를 공급하며 프리미엄 전략을 이어왔다.
이들 3사는 최근에야 LFP 시장에 진입했지만 기술력과 원가경쟁력에서 이미 중국 기업들에 밀리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응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 전략의 결과지만 그 대가로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을 내준 셈이다.
국내 배터리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 내 공장이 여전히 가동되고 있지만 내수 중심의 중국 시장보다는 북미와 유럽 등 외부 시장에 전략의 초점이 맞춰진 것이 사실"이라며 "중국의 자국 기업 중심 납품구조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업계 전반에 퍼져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베이징 시내를 가득 메운 전기차 행렬을 보고 있으면 한국 배터리 산업이 놓친 시장의 크기가 결코 작지 않다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격차가 기업의 전략적 선택이나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산업에 대한 국가의 시각과 접근방식에 있었다.
기술경쟁력에서도 중국은 추격 단계를 넘어섰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가 발표한 2023년 핵심 기술 추적 지표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배터리 분야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낸 상위 30개 연구기관 중 27곳이 중국에 있었으며, 이 분야에서 인용 수 상위 10%에 속하는 논문 중 약 76%가 중국 연구진이 작성한 것이었다. 중국이 연구개발(R&D) 인프라와 인재양성 측면에서도 이미 세계 배터리 산업의 중심축에 올라섰다는 방증이다.
반면 한국은 달랐다. 배터리를 수출중심 산업으로 인식하며 국내 생태계 육성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IRA 대응을 위한 북미 생산기지 구축에는 정책 지원이 이뤄졌지만, R&D나 산업 다변화 전략, 내수기반 확대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정부가 직접 기업에 자금을 투입하며 산업을 밀어붙인 중국과 달리 한국은 보수적이고 우회적인 지원에만 머무르며 산업전환 속도에서 뒤처졌다.
결론적으로 중국 배터리 생태계는 기업의 노력만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다. 정부 주도의 인프라 확충, 디젤차량 규제, 보조금 지원 등이 전기차 시장을 키웠고 그 위에 기술과 생산체계가 올라탄 것이다.
전기차가 '보급'되는 시대인 지금은 기술력뿐 아니라 산업구조와 정부 정책이 복합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베이징 도로 곳곳에는 한국 배터리 산업이 놓친 전략적 시차가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중국이 '양(量)'으로 시장을 넓혔다면 한국은 '질(質)'로 다시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삼원계배터리의 고에너지 밀도, 안전성, 수명 등에서 국내 배터리3사의 기술력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무대에서의 성과다. LG엔솔은 GM, 현대차, 혼다 등과 대규모 장기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북미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SK온과 삼성SDI 역시 포드·BMW 등과의 협력을 기반으로 북미와 유럽 프리미엄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실제로 이들 3사는 북미와 유럽에서 수년간 안정적인 매출을 확보할 수 있는 수십조원 규모의 수주잔액을 확보한 상태다.
배터리 산업의 주도권 경쟁은 이제 막 2라운드에 접어들었다. '보급' 중심의 양적 확산을 지나 '고도화'로 전환되는 단계에서 한국이 다시 도약할 수 있는 지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베이징의 초록색 번호판 행렬에서 확인한 것은 단지 뒤처진 현재가 아니라 앞으로 따라잡아야 할 미래의 방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