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의 회의록, 녹취 테이프 그리고 사진 여러 장. 고(故)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남긴 경영 기록물이 디지털로 되살아났다. 유고 27년 만에 공개된 이 자료는 한국 경제사의 생생한 현장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SK그룹은 최근 '디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통해 1970∼1990년대에 이르는 경영 활동 전반을 디지털로 복원하고 이를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고 2일 밝혔다.
이번 프로젝트는 SK 창립 70주년을 맞아 지난해 발간한 어록집 제작 과정에서 시작됐다. 당시 그룹 수장고에 보관돼 있던 수천 건의 옛 문서와 음성기록의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본격적인 디지털 복원이 추진됐다.
SK는 약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총 1만7620건, 13만1647점에 달하는 기록을 고음질·고화질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다. 녹음 테이프만 3530개, 문서 3500여건, 사진 4800여장에 이른다. 하루 8시간씩 쉬지 않고 들어도 1년 이상 걸리는 분량이다.
기록물에는 구성원과의 간담회, 주요 회의, 국내외 인사와의 대담 등에서 나온 최 선대회장의 육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1982년 신입 구성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좁은 한국 땅덩어리에서 학연, 지연, 파벌을 조장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1992년에는 임원들에게 "R&D 직원도 시장과 고객을 알아야 기술이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같은 해 SKC 임원들과의 회의에서는 "플로피디스크 안에 소프트웨어를 담으면 가치가 20배 오른다"며 산업의 중심축이 제조에서 콘텐츠로 이동할 것을 예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단순한 과거 회고를 넘어 SK의 현재 사업 포트폴리오와도 맞닿아 있다. SK는 최근 인공지능(AI) 반도체, 친환경 에너지, 바이오 분야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다. 이번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은 SKMS(SK Management System), 수펙스(SUPEX) 추구 문화 등 SK 고유의 경영관리체계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 이를 미래 전략의 나침반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SK는 지주사 체제 하에서도 그룹 철학이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2024년 말 기준 SK의 연결 대상 종속회사는 649개에 달하며 이 가운데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SK스퀘어, SKC 등은 각자의 영역에서 AI·반도체·에너지 전환 등 중장기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같은 사업구조는 최 선대회장이 강조한 "기술은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철학과 궤를 같이한다.
SK 관계자는 "최 선대회장의 경영 기록은 단순한 역사적 사료가 아니라, 기업 경영의 방향성을 담은 철학적 자산"이라며 "양이 방대하고 오래돼 복원이 쉽지 않았지만 첨단 기술을 활용해 품질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SK는 향후 이 자료를 내부 구성원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공유해 사회적 가치 기반의 경영철학을 전파하고 산업사 연구 기반 확대에도 기여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