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폭력은 똑같다 /김선주
“남편이 말도 안 하고 거칠게 방문을 닫거나 하면 불안하다. 밖에서 화나는 일이 있었나 아니면 내가 뭐 잘못한 일이 있었나 생각하게 된다. 때릴 거면 빨리 때리지 폭풍전야 같은 이런 상황은 너무 끔찍하다. 숫제 맞는 것이 낫다.”(매맞는 아내)
“미국은 뭐하고 있는 거야 이라크를 칠 거면 빨리 치지. 이렇게 불확실하게 질질 끌다가는 미국 경제고 세계 경제고 우리나라 경제고 점점 더 어려워질텐데….”(사람 인심)
“우리 선생님은 때리긴 하지만 참 좋은 분이에요. 우리 잘 되라고 때리시는 건데요. 공부는 얼마나 잘 가르치시는지 우리 반이 학교 전체에서 성적도 제일 좋아요.”
“남편은 때리는 것만 빼면 나무랄 데가 없어요. 월급도 꼬박꼬박 갖다주고 친정에도 잘 해요. 때리고 나면 얼마나 후회하는데요. 워낙은 좋은 사람이에요.”
“미국이 우리한테 잘못한 게 뭐 있냐 6·25 때 얼마나 많은 미군들이 목숨을 바쳤는데 반미감정이라니…. 미국에 우리 교포들 많이 사는데 우리에게 나쁜 감정 가지면 어떻게 하나. 이라크가 질 게 뻔한데 무조건 미국 쪽에 붙어야지 무슨 반전운동이야.”
“선생이 팬 것은 잘못이지만 너희들이 잘못했으니까 팼지 잘했는데 팼겠냐 너희들 사람 되라고 때리는 사랑의 매라는 것을 알아야지.”
“야구방망이로 때린 것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지. 왜 혼자서 여행을 가나. 돈 좀 번다고 잘난 척했겠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지 공연히 때렸겠어.”
“미국이 국익 때문에, 세계 석유시장을 컨트롤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을 누가 모르나 그렇치만 이라크도 잘한 것 하나도 없어. 뭘 믿고 미국에 맞서는 거야. 북한도 국민들 굶겨 죽이면서 왜 핵을 개발한다고 하나 가만히 있으면 식량도 지원되고 경제발전도 될텐데….”
모든 폭력의 메커니즘은 왜 이렇게 꼭같은 것인가. 폭력에 길들여지다 보면 폭력을 당하는 것이 편안한가 보다. 불안하지 않으니까. 폭력에 중독되면 가해자에게 순응하고 복종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마지막에는 피해자가 무엇이든 잘못한 게 있으리라는 식으로 본말이 전도되고 피해자 자신도 자신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가치판단에 혼돈이 오고 이성의 마비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경실씨가 불행한 사건의 주인공, 매맞는 아내였다는 사실을 온 천하가 알게 된 것은 방송인인 이씨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 피아니스트가 손을 잃고, 마라톤 선수가 다리를 잃는 것처럼. 방송에서 사람들을 웃기고 스스로도 유쾌하게 웃어제치던 그가 다시 방송에 출연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야구방망이 사건과 연관짓지 않을 수 없다. 다시는 그의 우스개에 폭소를 터뜨리기 어렵게 되었다. 개그우먼이라는 직업적 특성 때문이다. 지난 연말 최진실씨가 남편에게 맞았을 때 최씨의 동생인가는 조성민씨의 주먹이 보통사람보다 두배는 크다고 했다. 야구 투수의 손이 특별히 강한 것은 당연하다. 경찰에 압수된 야구방망이나 조씨의 주먹은 흉포한 무기다. 임신 8개월의 아내가 맞았는데도 언론은 최씨가 맞을 짓을 해서 주먹질 좀 한 것으로 치부했을 뿐 주먹질에 대해 문제삼지 않았다. 당시 조씨를 긴급체포했던들 야구방망이 사건은 터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유난히 힘을 숭상하고 폭력에 관대한 것은 약소민족으로서 주변강국에 시달려온 역사 때문일까. 힘 있는 곳에 기대어 사는 것이 안전하다는 경험에서 나온 생존본능 때문일 것이다. 힘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은 힘에 대해 과신을 하게 되고 힘 있는 집단의 우산 속에 들어가 보호받고 편안히 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힘이 정의이고, 억울하면 출세해라, 힘을 길러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져 폭력의 악순환을 부른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에 분노하면서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침묵하는 것,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분노하면서 가정폭력에 무심하게 되는 것은 가치관의 혼돈이 일어난 탓일 것이다. 모든 폭력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도덕심의 잣대는 하나여야 한다.
김선주 논설의원sunj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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