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위하는 기쁨
혼자 사는 사람에겐 집이야 말로 가장 혼자다울 수 있는 공간입니다. 뭘 해도 자유로워요. 가족들이 다 있는 집보다 혼자 하기에도 훨씬 편한 공간이에요. 누가 있으면 신경 쓸 것도 많고 불편하잖아요. 어쩌면 자위는 혼자 사는 사람의 특권이에요. 샤워를 하고 얼마 전 친구에게 받은 바이브레이터를 꺼냈어요. 제 손바닥보다도 훨씬 작아요. 모양도 동글동글 조약돌같이 생겨 색깔마저 귀여워요. 바이브레이터를 둘러싸고 있는 면면은 부드러운 실리콘 느낌이에요. 작은 모양새치고 진동하는 폼도 약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해서 타인의 체온도, 심지어 제 체온도 담기지 않은 기계를 마주보고 있는 게 처음엔 생경하고 또 민망했어요.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 이러다 정말 조만간 로봇의 시대가 오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무렵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기 시작했어요. 기계의 생경함은 이내 기계의 편리함에 묻혀버렸어요. 어쩌면 내 손으로 직접 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어요. 손을 바쁘게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편하니까요. 물론 손보다 짧게 걸릴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어요.
“자위하세요?”
주변의 여자인 친구들에게 자위 경험을 물어보면 혼자 사는 친구들조차 대부분은 하지 않았고 또 하지 않는다고 대답해요. 반면에 두어 명의 친구들은 지금도 종종 한다고 말해요. 그 친구들의 첫 자위 나이는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어렸다고 하는데, 그에 비하면 제가 첫 자위를 했던 나이는 꽤 많이 늦은 편이었어요. 물론 여자도 자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부터 저는 그때까지 겪어온 일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어린 시절 목욕탕에서 세차게 뿜어져 나와 소음순을 자극하던 물기둥, 철봉 오래 매달리기를 할 때마다 하체로 피가 쏠려 느껴지던 간지러운 쾌감. 실은 이런 것들도 자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대로 된 첫 자위’는 첫 섹스 후 느꼈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어요. 첫 섹스를 위해 나름 많은 걸 대비했지만 정작 제 몸을 공부하지 않았던 저는 무언가 불편했어요. 그래서 그날 아주 경건하게 누워 마치 의식을 치르듯 내 몸을 탐구하기 시작했어요. 그야말로 인위적인 자위였어요.
역사적이지만 인위적이었던 자위가 벌어지기 10년 전쯤, 한창 인터넷과 커뮤니티에서는 ‘딸딸이’, ‘탁탁탁’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었어요. 기억하세요? 학교에서도 남자애들 사이에서 그 단어들이 입으로 오르내리곤 했어요. 남자애들은 자기들끼리만 아는 단어로 킬킬거렸죠. 인터넷에서는 탁탁탁과 관련된 온갖 이미지들이 돌아다녔어요. 곽티슈, 잠근 방문, 컴퓨터 화면의 무언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여동생, 밤꽃 냄새가 나는 닦아야만 하는 무언가. 그때부터 자위라는 단어를 알게 된 거예요. 남자는 야동을 보며 흥분하고 성기 어딘가를 ‘탁탁탁’ 자위를 한다, 쾌감 후엔 처리할 무언가가 있다, 아, 이게 자위구나.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남자들만 하는 어떤 것. 그 10년 전쯤,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야동 이야기는 간간이 들렸어요. 그렇지만 자위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었어요. 야동을 보는 남자아이도 간혹 변태라 놀림 받았지만 야동을 보는 여자애는 그 이상의 수모를 당했거든요. 여자애 입에서 자위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아이들로부터 어떤 시선을 받을지는 불 보듯 뻔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자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딸딸이’와 ‘탁탁탁’과 킬킬거림
‘남자만 하는 어떤 것’으로 남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성욕 드러내면 ‘쉬운 여자’ 낙인
여성의 자위는 없었고, 없다
혼자 하는 기쁨 느끼는 순간이
내 몸을 만나는, 쾌락의 순간
분명 여자도 성욕이 있는데 왜 자위를 하지 않았을까. 분명 자위를 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왜 우리는 자위를 말하지 않았을까.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내가 내 몸을 잘 몰랐다는 거예요. 적극적으로 내 몸에 관심을 가지고, 그래서 그 역사적이고도 인위적인 자위를 하기 전까지 저는 오줌이 어디로 나오는지 질 구멍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심지어 소음순 사이의 클리토리스는 존재조차 몰랐어요. 그저 소변 볼 때 멀뚱멀뚱 소음순 양 짝을 보며 이건 왜 이렇게 다르게 생겼을까 생각했을 뿐이에요. 청소년인 제가 배웠던 학교의 성교육은 늠름한 난자를 향해 달려가다 수십억마리의 정자가 떼죽음을 당한다는 비디오 시청이었어요. 혹은 성기의 의학적 단면도 그림을 두고 그게 제 성기의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전립선이니 나팔관이니 쳐다보고 있었답니다. 그런 제가 청소년 시절, 탐폰을 시도하다 도대체 이걸 어디다 끼워야 될지도 몰라 실패했던 경험은 별로 이상할 일도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제 성기의 어디가 무엇인지, 무얼 위한 것인지 정확히 배울 기회도 없는 판에, 성교육으로 바람직한 자위를 하는 법을 가르칠 리도 없었어요. 그러니 나이가 어린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자위가 재미난 주제로도 오를 일이 없었고요. 게다가 나이를 조금씩 먹는 동안, 여성이 성욕을 드러내는 순간 종종 ‘쉬운 여자’나 ‘걸레’, ‘줄 수 있는 여자’가 되는 것을 봐왔으니 더더욱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 거죠. 자위를 하는 남자아이는 휴지를 건네받을 건강한 청소년이 됐어요. 반면 여자아이는요? 성인이 되니 상황이 조금은 나아졌지만 근본적인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어요. 나이가 들자 여자인 친구들 사이에서 섹스 이야기는 종종 흘러나왔지만, 어쩐지 자위라는 단어는 점점 더 금기시됐어요. 청소년기 때나 지금이나 여자의 자위는 없었고, 없어요. 자위 이야기 많이 하세요?
악순환인 거 같지 않아요? 성교육에서 제대로 배운 게 없으니, 그리고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자위를 하지 않는다. 시도도 않는다. 경험이 있어도 남자들의 자위처럼 우스갯소리로도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성기도 잘 모르게 된다. 클리토리스의 위치도 모른다. 어디를 어떻게 어느 정도로 만졌을 때 쾌감을 느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파트너에게 섹스할 때 요구하기 어렵다. 나부터도 어딜 만졌을 때 높은 쾌감을 느끼는지 잘 모르니까. 자위가 없으니 자위를 말할 수 없게 된다. 저는 계속 이 악순환이 지속돼온 거 같아요. 오랜 시간 동안.
맘껏, 눈치 보지 말고 하세요
혹시 얼마 전 공개된 성교육 표준안 보셨어요? 저는 보고 크게 좌절했어요. ‘탁탁탁’이 유행하던 10년도 훨씬 더 전보다 크게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아서요. 이런 성교육 표준안 아래에서 특히 여성의 성욕과 성기에 대해 얼마나 왜곡된 시선을 가지게 될까요. 이러니 많은 분들이, 그리고 제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거겠죠. 자위를 해본 적 없는 혼자 사는 여성분들, 혼자 살 때 눈치 보지 말고 맘껏 자위하세요. 누가 들어올 걱정도 없고 섹스토이가 담긴 택배 박스를 가족이 뜯어볼까 노심초사할 일도 없어요. 이 기회로 본인의 몸에 대해 알아보세요. 물론 혼자 사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에요. 이 글을 보는 혼자 살지 않는 많은 여성들도 자위에 관한 편견을 깨고 입 밖으로 꺼내고 자위를 시도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어요. 혼자 하는 기쁨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10년 전의 ‘탁탁탁’이 그랬듯이요.
아참, 스웨덴에서는 여성의 자위를 일컫는 신조어 ‘클리트라’(Klittra)를 만들었대요. 거기서도 여성의 자위를 입 밖으로 내는 경우가 드물어 딱히 자위를 칭하는 단어가 없었대요. 클리트라는 스웨덴어인 ‘클리토리스’(klitoris, 음핵)와 ‘글리트라’(glittra, 반짝거리다)를 합성해 만든 단어라고 해요. 한국에서도 조만간 이렇게 여성의 자위를 딱 지칭하는, 누구나 알아듣는 그런 단어가 생기지 않을까요?
혜화붙박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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