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우경임]“내가 하는 일이 틀렸다 생각하지 않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3월 26일 23시 15분


우경임 논설위원
우경임 논설위원
‘의대 2000명 증원’으로 촉발된 의정 갈등이 1년이 넘도록 전공의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달 기준 전국 수련병원에 근무 중인 전공의가 1672명이다. 지난해 임용된 전공의(1만3531명)의 12% 수준이다. 이 중 절반은 지난해부터 수련을 이어 왔고, 절반은 올해 복귀했다. 뉴스에선 온통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의 목소리만 들린다. 그 “착취적”이라는 수련 환경을 묵묵히 견디는 1672명의 전공의는 “동료가 아니”라는 비난과 “감사한 의사”라는 조롱 속에 숨죽이고 있다.

이들은 왜 병원을 떠나지 않았을까.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인터뷰를 시도한 전공의들은 신원이 밝혀질까 거절하거나, 겨우 응하더라도 응급 상황이라며 통화가 미뤄지곤 했다. 지난해 2월 전공의 집단 사직 당시 병원을 떠났다가 복귀했다는 전공의 A 씨의 이야기를 어렵게 들었다.

“숭고한 뜻 아니다… 할 일이니까”

전공의 A 씨 역시 2000명 증원이 무모하고, 수련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전공의들이 주 80시간이 넘는 근무시간, 낮은 임금을 성토하고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동료들은 언제라도 응급 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장시간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간 “수술 등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양질의 트레이닝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A 씨는 열흘 만에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참의사라고 또 조롱당할지도 모르겠지만…”이라며 잠시 말을 멈췄다. “치료가 필요한 소아 환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을 버리고 나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동료들이 모두 떠난 병원으로 돌아온 대가는 혹독했다. 의사 온라인 커뮤니티 ‘메디스태프’에 공개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들었다. 가족사진까지 올라오는 악의적인 공격도 당했다. 의정 갈등 초기에는 인턴, 레지던트 여럿이 나눠서 하던 업무를 혼자 감당하며 격무에 시달렸다. 내적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남아 있었던 이유를 묻자 A 씨는 “내가 하는 일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숭고한 뜻이 아닙니다. 의사가 환자를 돌보는 건, 그냥 할 일이니까요.”

돌아오지 않는 전공의들도 이해한다고 했다. 복귀하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많지만 웬만해선 집단의 압력을 이기긴 어렵다고 한다. 지금의 평판이 평생을 따라다니며 교수 임용, 개원가 취업까지 좌우하므로 블랙리스트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0명 중 1명은 환자를 지켰다

전공의 이탈로 의료 시스템이 마비되자 정부는 사실상 백기 투항 중이다. 전공의 면허 정지까지 거론하더니 결국 사직서를 수리했다. 수련 공백을 면제해 다음 연차로 승급시키고 입영 특례를 주면서 돌아오기만 해달라고 읍소한다. 하지만 병원에 남은 전공의에 대해선 어떤 정책적 배려도 들어보지 못했다.

의료 개혁이라도 성과를 내면 좋으련만, 줄줄이 후퇴 중이다. 의사 면허를 따고 1, 2년간 수련을 거쳐야 개원을 할 수 있도록 한 ‘진료 면허제’ 추진은 접었다. 보톡스, 필러 등 일부 미용 시술의 의사 독점을 깨려던 계획도 철회했다. 기형적인 의사 쏠림을 막아 필수 의료를 살리려던 방안들이었다.

물론 병원을 지킨 전공의마다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숭고한 소명 의식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환자 곁에 남은 이들이 오히려 숨어 지내고, 그 희생이 사회적으로 가볍게 여겨지는 건 안타깝다. 전공의 10명 중 1명인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따돌림을 당하고, 동료 업무까지 떠맡으면서도 ‘그냥 해야 할 일이라 한다’며 병원을 떠나지 않은 전공의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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